흙집의 환상적 역설과 소통
- Posted at 2008/03/06 08:05
- Filed under 살아가는 이야기
김민웅 / 성공회대 교수
흙집의 환상적 역설과 소통
주인이 미리 정성껏 장작을 땐 방바닥은 완전히 감동적이다.
등줄기를 타고 온 몸으로 퍼지는 더운 기운은 이 세상에 이곳과 견줄 수 있는 데는 없다는 확신을 줄 지경이다. 피곤해진 몸을, 구들이 자칫 타버릴 것만 같은 아랫목에서 팔다리 활짝 펴고 지진다는 것은 이래서 좋다. 그 뜨거움을 잘 견디지 못해 아 뜨뜨뜨, 하면서도 시원하다. 침대생활이 결코 맛보게 해 줄 수 없는, 우리네 조상들이 남겨준 환상적 역설이다.
그저 열기가 오르기만 한다면, 건조한 한증막이 될 터인데 흙으로 만든 집은 숨을 쉰다. 그래서인지 몸은 느긋하게 기뻐하고, 머리는 그지없이 맑다.
방안의 공기는 어느 순간 더운 걸 지나쳐 후끈 달아오르기까지도 한데, 기이하게도 숨이 턱턱하고 막히지 않는다. 게다가 창호지를 바른 문은 바깥 찬 공기를 생각 이상으로 잘 차단하면서도 그와 동시에 아주 은밀하게 자연환기를 해주고 있어 흙집의 공간은 외부와 끊임없이 소통하고 있는 셈이다. 바닷가가 그리 멀지 않아 방 안의 공기는 겨울 바다소식까지 담아내고 있다.
나는 불이 되고 바람이 된다. 불길을 온 몸으로 받아들여도 재가 되지 않고, 바람을 타고 산길을 휘감아도 피곤치 않다. 흙이 되고 나무가 된다. 그건 서로 뒤엉켜 섞인 채 내 안에서 집을 짓고 있다. 자로 잰 듯 각이 지지 않고 들쑥날쑥 한 것이 도리어 아름답고, 소박하면서도 여유로운 집을 짓는다.
가만히 누워 바다 속을 헤엄치고, 때로 들판을 달리기도 한다. 한껏 게으름을 피우며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아도 어느 누가 다그치지 않는다. 그 작은 흙집의 온돌방이 이렇게 자유가 풍성한 곳이라고 미처 상상할 수 없었다.
새벽 4시가 되니 닭 우는 소리가 들린다. 이 흙집에서 지내는 이틀 동안 들었던 그 소리는 시간도 정확하다. 어김없다. 자연의 시계가 내는 소리는 따르릉하고 울리는 기계음과는 전혀 다르다. 정겹고 푸근하다. 잠결에 그 소리를 듣는 이는 자연의 생명력과 분리되지 않는 현실을 체감한다.
느긋해지고 소탈해진 삶은 마음도 너그럽게 만든다. 그런 마음을 가진 곳에서 불필요한 싸움도 그치고 성찰의 깊이도 생겨난다. 탐욕은 설 곳이 없고, 인간에 대한 인색함도 사라진다. 뜨거운 불길로 달구어진 방바닥에 누워 온갖 잡념을 소멸시키고, 어느 사이에 넉넉해진 마음만 가지고 일어난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욕심은 도시의 건물 높이만큼 커지고 있고, 우리의 마음은 아스팔트처럼 굳어가고 있다. 부드러운 것이 강하고, 물러서는 것이 이기며 자신을 태우는 것이 세상을 감동시키는 것을 잊고 산다. 환상적 역설의 비밀을 깨닫지 못하는 시대의 슬픔이다. 상처가 많은 시대의 어리석은 습관이다.
흙으로 만든 집도 소통할 줄 아는데, 우린 진정한 소통의 능력을 잃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현실의 아궁이에 화끈하게 불을 땠으면 좋겠다. 아, 그런데 우린 장작꾸러미를 넣을 아궁이조차 막아버리고 살고 있지는 않은가? 이제 더 이상 필요치 않다고 말이다. 그건 뭘 몰라서 하는 소리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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