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중심의 `통신비밀보호법`으로
- Posted at 2008/12/15 12:01
- Filed under IT 과학
민경배 | 경희사이버대 교수
팬옵티콘(원형감옥)을 통한 감시
전자감시 문제를 이야기할 때면 빠뜨릴 수 없는 인물이 두 명 있다. 제레미 벤담과 조지 오웰이다. 제레미 벤담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실현하기 위해 공리주의를 주장한 철학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최대 다수의 최대 감시”를 가장 효과적으로 실현할 수 있도록 고안된 팬옵티콘(원형감옥)의 설계자이기도 하다.
팬옵티콘은 감옥의 중앙에 높은 감시탑을 세우고, 원형의 벽면 둘레를 따라 죄수들의 방을 배치한 구조이다. 중앙 감시탑은 늘 어둡게 하고, 죄수의 방은 밝게 하여 감시자의 시선이 어디로 향하는지를 죄수들이 알 수 없도록 되어 있다. 팬옵티콘에 갇힌 죄수들은 자신들이 늘 감시받고 있다는 느낌을 가지게 되고, 결국은 죄수들이 규율과 감시를 내면화해서 자발적으로 복종하게 만든다.
이러한 팬옵티콘이 감옥 담장을 넘어 전 사회적으로 확장된 감시 국가를 소설로 묘사한 사람이 조지 오웰이다. 그의 대표작 <1884>의 무대인 가상의 국가 ‘오세아니아’는 절대 권력을 가진 통치자 빅브라더가 텔레스크린, 마이크로폰 등 첨단 감시 장치와 사상경찰을 동원해 사람들의 사생활을 철저히 감시하고 있다. 이곳 사람들은 자신의 의식과 사상까지도 통제당하는 끔찍한 세상을 허우적대며 살아가야 한다.
통신비밀보호법 개정안 빅브라더의 공포
오늘날 현대인들은 팬옵티콘이 나와 상관없는 감옥 담장 안 일이라고 치부해 버릴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다. 빅 브라더가 지배하는 오세아니아가 그저 소설 속에서만 존재하는 창작의 산물일 뿐이라고 안심할 상황 역시 아니다. 이미 감시의 시선은 현실 사회 곳곳에 뻗쳐 있다.
프랑스의 석학 푸코는 이를 가장 먼저 간파한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저서 <감시와 처벌>을 통해 팬옵티콘의 원리가 사회 전반으로 파고들어 규범사회의 기본 원리인 팬옵티시즘(panopticism)으로 정착했음을 경고했다. 정보 기술이 빠른 속도로 발달하면서 이러한 푸코의 경고는 이제 엄연한 현실로 성큼 다가왔다. 전자 감시사회의 도래는 정보화의 그늘이 빚어낸 가장 치명적인 위협이다.
지금 정부와 여당이 또 하나의 팬옵티콘을 법이라는 이름으로 준비하고 있다. 통신비밀보호법 개정안이 그것이다. 얼핏 명칭만 보면 헌법상 보장된 기본권 중 하나인 국민 개개인의 통신 비밀을 보호해주기 위한 법처럼 들린다. 그러나 꼼꼼히 살펴보면 빅 브라더의 공포를 느끼게 하는 아주 위험한 내용들을 담고 있다.
전 국민의 통신내용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수사기관이 감청 가능
이 개정안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는 전 국민의 통신 내용을 수사기관이 감청할 수 있도록 제도적, 기술적 장치들을 마련해 주고 있다는 점이다. 이 개정안이 통과되면 전기통신 사업자는 수사기관의 감청 협조에 필요한 장비 등을 의무적으로 구비하고, 통신사실 확인 자료를 일정 기간 동안 보관하고 있어야 한다. 한 마디로 모든 국민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감청 대상이 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이다.
정부와 여당은 범죄수사나 국가안전보장 목적 외의 감청은 금지하고 있으며, 감청 대상 범죄의 종류도 제한하고 있기 때문에 모든 국민이 감청 대상인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또한 범죄 예방과 원활한 수사를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조치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팬옵티콘의 핵심 원리가 중앙 감시탑에서 실제로 감시를 하고 있느냐 여부와 무관하게 사람들에게 규율과 감시를 내면화하여 복종을 이끌어내는데 있음을 다시금 상기할 필요가 있다. 언제든 자신의 통신 내용을 감청할 수 있는 법적 근거와 기술적 장비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전자감시의 공포를 느끼기에 충분하다.
범죄 예방과 수사는 국민의 안전한 삶을 보장하기 위해 국가가 담당해야 하는 서비스이다. 그런데 통신비밀보호법 개정안은 오히려 모든 국민에게 수사기관을 위해 자신의 통신기록을 고스란히 제공하는 서비스를 요구하고 있다. 본말이 뒤집혀도 한참 뒤집힌 논리이다. 모든 국민을 잠재적 범죄자이자 수사기관을 위한 서비스 제공자로 취급하는 이 개정안이 도대체 누구를 위한 법인지 다시금 생각해 볼 일이다. (디지털타임즈, 2008. 12.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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