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숙렬 / 전 2기 방송위원회 방송위원, 전 문화일보 여성 전문기자


심청전은 해피엔딩일까?
청이는 황후가 되고
심봉사는 눈을 떳으니
해피엔딩 이겠지?

그런데 청이 엄마는
사용자 삽입 이미지

유숙렬 시집


어디로 사라져 버린 걸까?

장님 남편에게 어린 딸을 맡겨 놓고
떠돌이 소금장사와 눈이 맞아
도망가버린 걸까?

책에서는
청이 어머니 곽씨부인이
청이를 낳은 지 7일 만에
산후조리를 잘못해 죽은 걸로 나오지.

앞 못 보는 남편이
산후조리를 제대로 해줬겠어?
더구나 청이 아버지 심봉사는
행실이 훌륭한 양반의 후예라는데.

청이가 몸을 팔아 얻은
공양미 삼백석은 어디로 갔을까?

심봉사에게 사기를 친
몽은사 화주승이 입 싹 씻었을까?
그 중은 약속도 못 지켰잖아

심봉사는 청이가 인당수에 빠진 후
뺑덕어멈이라는 음란하고
간교한 여자와 살며
세속적인 인간으로 변했대.

그녀가 심봉사 집에 드나들며
엿도 바꿔 먹고
수발도 들어주고 한 이유는 뭘까?
청이에게 젖동냥을 해주다가
그 남자가 불쌍해졌던 걸까?

청이가 진작에
뺑덕어멈과 한 편이 됐더라면
인당수에 빠지지 않아도 됐을 텐데.....

청이가 인당수에 빠진 이유가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서라고?
에이. 설마. 그럴리가!

사실은 장남아버지 수발에
인생을 저당 잡힌 딸이
자살을 해버린 거 아닐까?

피로 맺어진 부녀간의
계약을 피로 물려버린
아버지와의 계약해지라고나 할까?

어쩌면 그건
딸들의 사랑을 불가능하게 하는
원천적 장애아버지들에 대한
딸들의 복수일지도 몰라.

니체는 인간이 예술과 같은
'거짓숭배'를 고안해 내지 않았다면
삶을 견디기 어려웠을 거라고
말했다더군.

그러니까 심청전의 해피엔딩은
산 자들이 삶을 계속하기 위해
만들어낸 '거짓숭배'인 셈이지.

그런데 니체는 또
그런 '거짓숭배가'가 없다면
'과학의 솔직함 때문에 역겨워
자살하게 되었을 것'이라고 말했어

그래서 청이가
인당수에 빠졌나봐!
인생이 역겨워서!

난 장님 아버지가 만들어 놓은
'거짓숭배'에 더 이상 속고 싶지 않아.

청이가 인당수에 빠진 이유는
아버지로 인해 불가능해진
사랑을 찾기 위해서야.

청이는 물에 빠져서
어머니도 만나고 용왕도 만나잖아
임도 보고 뽕도 따고 그런거지
하지만 청이가 만난 용왕은
아쩌면 달이 잠시 물에 빠져서
만들어낸 환영에 불과할지도 몰라

난 인당수에 빠져서야
만날 수 있는 용왕이나
연꽃으로 환생해서 만나는
황제 따위는 필요 없어

난 인당수에 자맥질해 들어가
연꽃 대신 피로 쓰여진
붉은 피켓을 따서 나올 거야

그런 다음
눈먼 아버지를 팔아
어머니를 살리는
딸의 얘기나 써 볼까?

어차피 인간은
'거짓숭배' 없이는 못산다며?

딸들도 살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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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숙렬 지음 | 이프 펴냄
여성 언론인이자, 가부장제 사회에 대항하는 여성의 목소리를 대변해온 페미니스트 논객 유숙렬의 첫 시집. 억압받고 소외된 여성과 외롭고 고단한 삶을 살아온 남성, 동시대를 살아가는 고독한 삶들을 감싸안는 주체적이면서도 섬세한 여성의 이야기를 담았다. 심청,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프랑켄슈타인에서부터 엄지공주, 조이스 캐롤오츠 등 동서고금을 가로지르는 풍부한 문학적, 문화적 인유들과 극적 독백, 대화적 엇갈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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